박장호 시 < 스테디 라이터 >
문화생활/책&만화&TV 2013. 12. 21. 01:06 |스테디 라이터
불 꺼진 집필실로 여자가 들어온다.
책상 위에는 낡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.
여자는 서표로 끼워둔 사내를 일으켜 세우며 노트를 펼친다.
여자는 만년필을 꺼내 들고 사내의 얼굴을 찍어 혈서를 쓴다.
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첫 번째 문장 뒤에
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두 번째 문장 뒤에
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세 번째 문장 뒤에
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는 네 번째 문장을 쓴다.
피범벅이 된 노트 위에서
사내는 혈서의 행간을 읽는다.
여자는 사내를 안고 첫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여자는 사내를 안고 두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여자는 사내를 안고 세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여자는 사내를 안고 네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흐르는 행간 위로
마침표가 떠간다.
마침표도 행간도 없는 창문 밖에 해가 뜬다.
침대 위에는 새빨간 사내 한 명이 누워 있다.
여자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몸을 침대 시트로 덮은 뒤
옷을 입고 여관을 나간다.
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박장호 시인
그의 시는 분주하다
이리갔다 또 저리로 갔다
아주 사나운 맹수가 되었다가, 지나가는 비실비실한 노인이 되었다가.
그의 종횡무진한 시를 사랑한다.
아니, 한편의 시를 사랑한다기보다 그가 쓴 모든 시를 묶어서 사랑한다.
그러므로 결론적으론 박장호 시인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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