스테디 라이터

 

 

  불 꺼진 집필실로 여자가 들어온다.

  책상 위에는 낡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.

  여자는 서표로 끼워둔 사내를 일으켜 세우며 노트를 펼친다.

  여자는 만년필을 꺼내 들고 사내의 얼굴을 찍어 혈서를 쓴다.

 

 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첫 번째 문장 뒤에

 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두 번째 문장 뒤에

 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가 쓴 세 번째 문장 뒤에

  나는 마침표를 찍는 작가야, 라고 여자는 네 번째 문장을 쓴다.

 

  피범벅이 된 노트 위에서

  사내는 혈서의 행간을 읽는다.

 

  여자는 사내를 안고 첫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
  여자는 사내를 안고 두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
  여자는 사내를 안고 세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
  여자는 사내를 안고 네 번째 마침표 뒤에서 운다.

 

  흐르는 행간 위로

  마침표가 떠간다.

 

  마침표도 행간도 없는 창문 밖에 해가 뜬다.

  침대 위에는 새빨간 사내 한 명이 누워 있다.

  여자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몸을 침대 시트로 덮은 뒤

  옷을 입고 여관을 나간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박장호 시인

그의 시는 분주하다

이리갔다 또 저리로 갔다

아주 사나운 맹수가 되었다가, 지나가는 비실비실한 노인이 되었다가.

그의 종횡무진한 시를 사랑한다.

아니, 한편의 시를 사랑한다기보다 그가 쓴 모든 시를 묶어서 사랑한다.

그러므로 결론적으론 박장호 시인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.

 

 

 


나는 맛있다

저자
박장호 지음
출판사
랜덤하우스 | 2008-08-31 출간
카테고리
시/에세이
책소개
2003년 『시와세계』를 통해 등단한 박장호 시인의 첫 시집. 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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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근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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